한 남자가 있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남쪽 어느 산에 들어가 100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정성을 다해 기도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는 이후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게 된다.
그 소원을 빌었던 곳에 비단을 하사하여 산을 둘러치지는 못해도, 천년만년 남겨질 이름을 주니, 그 이름이 바로 금산이다. 그래서 남해 금산은 비단 ‘금(錦)’ 자를 쓴다.
(https://ncms.nculture.org/traditional-stories/story/6189 참조)
이야기 2.
중국 ‘진시황제’는 죽음을 벗어나 영원한 삶을 원했다. 시종 ‘서불’이 ‘진시황(秦始皇)’에게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 ‘상서’하여 허락을 얻고,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여 명(혹은 3,000명)을 거느리고 발해만 건너 동쪽 ‘삼신산’으로 가던 중 이곳 ‘금산’을 찾아 한동안 수렵 등을 즐기며 머물다 떠나며 자신들의 발자취를 바위 위 화상문자(畵像文字)로 새겼다.
▲ 사진 : 남해각석
남해 금산 아래 암각화가 있다. 2천 년도 초반까지 그 글씨가 "서불과차-서불이 여기에 도착했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서불 이야기는 남해 바다를 건너 멀리 제주도까지 이어진다. 제주 ‘정방폭포’도 이와 비슷한 암각화가 있었고, 지금은 ‘서복전시관’도 있어 이 이야기는 구전에 구전을 더하며 오늘날 전설이 되었다. 남해 금산으로 부소암 방향 등산로 중간에 이 암각화를 볼 수 있다.
▲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서복전시관 전경 및 정방폭포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세월의 뼈와 살이 붙어 드라마틱한 전설이 되기도 한다. 남해 ‘금산’이야 말로 이러한 전설이 되어 오늘날 스토리텔링에 있어 빠지면 아쉬운 곳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계만 하더라도 고려 후기 신흥 무인 세력으로 고려 우왕 때 동북면에서 홍건적, 여진족과 전투로 이름을 날렸고, 남쪽으로는 남원 부근에서 왜구를 격파[황산대첩-1380년(우왕 6) 9월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이긴 전투]하는 등, 동분서주하던 때이다. 100일 동안 기도를 드릴 그런 한가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이와 같은 유사 전설로 고성의 금태(金太)산 또한 이성계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다.
[금태산계승사 백악기 퇴적구조'는 2006년 12월 천연기념물 제475호로 지정된 중생대 백악기 물결자국을 비롯해 빗방울자국과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남해 상주리 석각은 국내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해석을 시도했으나, ‘서불과차’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결론은 없으며, 대신 암각화, 고대 문자설 등, 이론만이 분분하여 결론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산의 정상 부근에 부소암이 있는데 진시황의 아들 부소왕자가 이곳 금산으로 귀양을 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기는 하지만, 부소왕자는 동행 호해에게 죽임을 당하니 아마도 그 영혼이라도 귀양을 왔었나 하고 이해 해본다.
이러한 이야기를 품고 남해 바다를 지키고 있는 곳이 ‘금산’이다. ‘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높이란 것이 해발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681(m)라고는 하나 등산 난이도는 중간 정도로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이 산 정상 부근에 ‘해수관음’을 모신 ‘보리암’이 있다. 우리나라 3대 ‘해수관음성지’로는 양양의 ‘낙산사’, 강화 ‘보문사’, 금산 ‘보리암’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해 여수 ‘향일암’을 넣어 4대 ‘관음성지’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소원 빌기 위해 전국서 찾는 사람이 하루 평균 1천 여명 정도가 방문할 정도로 유명한 전국구 ‘암자’이다.
<남해 금산과 보리암>
아마도 간절한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 주는 그런 영험함이 있는 사찰이니, 간절함이 필요할 것 같으면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물론 이후 결과는 내가 아닌 ‘관음’이 해주실지도!
등산로는 대개 상주 방면 금산탐방지원센터와 두모계곡 입구 2곳이 있다. 금산탐방센터는 경사가 급하고 힘든 구간이나 ‘쌍홍문’을 지나 조금만 가면 ‘보리암’에 도착할 수 있다.
두모계곡방향은 ‘남해석각’과 ‘부소암’을 지나 ‘단군성전’으로 이어지는 구간으로 수목이 우거져서 시원하게 오를 수 있다. 두 방향 모두 대략 2시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마지막 방법은 바로 정상 아래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 셔틀이나 자차를 이용 ‘복곡 제2 주차장’으로 올라가고, 이후 주차장에서 큰길을 따라 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그곳이 ‘보리암’이다. 암자 아래 ‘이태조기단’이 있고, 바다를 보고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금산산장’이 있다. 컵라면을 먹으며 보는 남해의 바다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 파전과 막걸리 그리고 비빔밥을 먹을 수 있어 등산객들로 인산인해였던 적이 있었다.
‘보리암’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볼만하지만 주변 바위들이 있어 더욱 절경이다. 건너편의 남해 바다 방향으로 내달리는 바위들이 우뚝우뚝해서 볼만하고, 구름이 걷히는 모습도 볼만하고, 저 멀리 ‘상사바위’에서 보는 ‘보리암’역시 볼만하다.
▲사진 : 보리암과 멀리 보이는 남해 바다
그리고 ‘부소암’에서 보는 남해 바다도 이에 못지않게 뛰어나다. ‘해수관음상’ 옆에는 삼층석탑이 있으며, 옆의 바위에는 나침반이 저절로 움직이는 영험한 바위가 있어 방문객의 이목을 끈다.
▲ 사진 : 상사암
‘보리암’에서 약 15분 정도 오르면 남해 금산의 정상이다. 여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이 아니라 봉수가 있다.
<창선도 대방산과 봉수대>
자연 암반 위 돌을 쌓아서 축조하였으며, 적량의 대방산, 삼천포 각산, 사천 안현산을 거쳐고, 진주 망진산 봉수대 그리고 합천 소현산, 거창 금귀산, 진천 소걸산을 지나 충주 망이성까지 전달하는 역할이다.
▲ 사진 : 부소암과 남해 바다
예나 지금이나 소통이 중요한 세상이다. 서주 말기 주나라 ‘유왕’이 애첩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봉화를 장난삼아 올리니, 종국에 진짜 적이 침입했을 때 제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 나라가 멸망한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와 함께 여행한다면 좀 더 풍성하고 지적이며 즐거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지적이지 않아도 좋다, 단지 즐겁기만 해도 된다. 그리고 이왕지사 옆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 하나쯤 설명해 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보리암’이 최근 젊은 친구들 사이에 사진 맛집으로 통하는가 보다. 산장에서의 컵라면, ‘보리암’ 한쪽 처마 아래에서 찍는 인생 사진, ‘쌍홍문’ 아래 소원을 빌며 찍는 한 컷도 좋거니와, 금산 정상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옛 선현들의 한글자 한글자를 조금만 더 여유롭게 보고 즐긴다면 여행의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 보리암 사진 명소 ( 포토 포인트 )
그리고 남해에 왔으니 가천다랭이마을의 암수석, 남해편백림, 갯벌체험, 죽방렴 체험도 좋고, 앵강다숲 마을 앞 갯벌의 돌살(독살) 체험과 단항마을 천연기념물 왕후박나무도 보고 오면 좋겠다.
▲ 사진 : (우)앵강다숲돌살 / (좌)가천다랭이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