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40901)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 용 산


- 빈 손 -






부 용 산 -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서정시이자 노랫말이 된 <부용산>은 전남 벌교의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시대의 아픔과 절절한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곡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친구의 아버님이자 시인인 박기동(朴璣東 1917~2004)은 시집간 어린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며 사무치는 그리움과 애틋함을 시 <부용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시에 곡을 부쳐 노래가 된 것은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음악가 안성현(安聖絃 1920~2006)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기동과 안성현은 당시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서 국어선생과 음악선생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부용산의 시에 작곡이 더해져 슬프고도 애달픈 노래 <부용산>이 탄생한다.

격동의 시기, 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지던 이 노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산으로 쫓겨간 빨치산들은 애잔한 곡조와 노랫말에 동화되어 노래 <부용산>을 즐겨 불렀고, <부용산>은 '빨치산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시인 박기동은 여수 출신으로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을 갔으며, 관서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해방 전에 귀국하여 벌교초등학교, 벌교중학을 거쳐 1947년 순천사범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8년 목포 항도여중 재직 시기에 ‘남조선 교육자협의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혹심한 고초를 겪게 되면서 교사직도 정직 처분이 된다. 작곡가 안성현은 나주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나왔다. 안성현은 무용가 최승희와 북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6.25 전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월북자 신세가 되었다.

이후 좌경시인으로 낙인되어 교직을 잃은 박기동은 일본 문학 번역가로 생계를 유지하며 생활을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박기동은 부인이 세상을 떠난후 이민을 결정하고 호주라는 이국에서 홀로 생활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그곳에서 못다 한 창작 생활을 하며 지내던 중 한국일보 논설고문 김성우의 요청으로 부용산 2절을 쓰게 된다. 그리고1999~2000년 광주 KBS TV 특집 다큐멘타리<부용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2000년 가을, 박기동은 부용산 시비(詩碑)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주에서 잠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가수 안치환을 찾아가 2절로 완성된 부용산을 전달하고 직접 노래를 불러 달라 부탁했다.

이제 구전가요였던 부용산은 안치환과 이동원·한영애 등 많은 가수에 의해 불러지고 있으며,벌교의 부용산에는 시비와 부용정이, 항도여중에는 노래비가 그리고 매년 <부용산음악회>도 열리고 있다.

고교 시절 친구 집에 가면, 늘 작은 상을 앞에 두고는 일본어책을 번역해 원고지에 옮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기억하는 박기동님은 평소 요가와 자연식으로 자기관리에 철저하신 모습이었고,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올곧은 분이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박기동님을 뵌 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연락을 받고 친구와 찾아간 일산의 요양병원에서 뵌 것이 그분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이제 시인도 친구도 없다, 그저 아픈 노래만 남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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