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240701)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빈  손 - 



오래 전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 때, 바로 옆 전시관에서는 송강 스님의 서예전이 있었다. 보름여 기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웃 사촌이라고, 스님이 좋은 향과 차도 내어 주시고 금새 편한 걸음이 되었다.
전시 마지막 날 스님께서 큰 서예 작품 하나를 품에 안고 내 전시장에 성큼 들어오시더니 덥석 내게 건네주고 가셨다.


스님의 작품 중 하나인 나옹 선사의 시가 한글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시를 읽고 나서, 반사적으로 내 전시장에 걸려 있던 큰 작품 하나를 덥석 들고가 스님께 건네 드렸다.
이 한시를 쓴 분은 고려의 나옹(懶翁, 1320~76) 선사다.
나옹 선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공민왕의 스승이었고, 무학 대사의 스승이었다.
당시 나옹 선사는 고려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이름을 드날렸던 고승이였다.
고향은 경북 영덕이었고, 부친은 지방 하급 관리인지라 어려운 형편에 세금을 내지 못해 관가로 끌려가던 만삭의 어머니가 길에서 낳으셨다.

그러니 태어날 때부터 생사를 넘나든 셈이다. 나옹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죽었다. 젊은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 그는 주위 어른들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은 왜 죽습니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람은 왜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고. 나옹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의 삶이 너무 절망스러웠다.



마침내 나옹은 경북 문경의 묘적암에서 출가했다.

고려 시대에는 한글이 없었으며 나옹 선사의 법문도 한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옹 선사의 한시 속에는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살려 3ㆍ4ㆍ3ㆍ4의 음절이 마치 우리 몸속에 흐르는 아리랑 가락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나옹은 자신의 깨달음을 짚어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원나라에는 인도 마가다국 왕자 출신인 지공(指空) 선사가 머물고 있었다.
부처님의 제자 가섭을 통해 내려오던 선맥(禪脈)이 108대 조사 지공 선사를 거쳐 나옹에게 전해졌다.
나옹 선사의 선맥은 다시 무학 대사로 이어지고, 조선 선(禪)불교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고려와 조선을 잇는 건널목에 ‘나옹’이라는 걸출한 선사가 있어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불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옹 선사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지금도 작업실 <춘향>에 걸려 있는 나옹 선사의 글은, 마음이 산란하고 어두울 때 무명을 밝히는 등불로 빛나고 있다.
인생은 한바탕 꿈결 같은 것이니 바람같이 물같이 살다 가라 하네... 욕심도 내려 놓고 집착도 버린다면, 자유롭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 것이다.
오늘 나는 내 삶 속에서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되고 있는가, 묻고 물어야 할 것이다.
“아재 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사바하”


▲ 작품 : <무제> 42*30 혼합 재료 빈손(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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