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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8일 (일요일) 맑고 더움 / 체류 11일 차 (요트 5일 차)
<우리만 몰랐던 마리나의 비밀 장소, 그리고 노숙과의 한 끗 차이>


오전 6시쯤, 마리나 중간쯤에 위치한 관리사무실에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공용 와이파이이지만 각자에게 프린트된 개별 비밀번호를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관리사무실이 있는 건물 1층에는 카페와 유료 세탁실도 있었고, 2층에는 이용객을 위한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1층 끝 현관문을 통과해 2층으로 올라갔다. 안에는 TV를 볼 수 있는 소파와 쿠션, 회의용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별도의 회의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안쪽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넓고 깨끗한 화장실과 샤워시설도 있었는데, 세면대에서는 따뜻한 물과 찬물이 모두 나왔고, 샤워는 반드시 동전을 넣어야 사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찬물 샤워도 동전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처음 마리나에 도착했을 땐 공중화장실이 없는 줄 알고, 마리나 입구 주차장 근처 관세청(Customs Office) 건물 뒤편에 있는 개방 화장실까지 멀리 다녀와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관세청 1층 계단 옆 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혹시나 싶어 비밀번호를 눌러봤더니 문이 열렸다. 안에는 넓고 깨끗한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었고, 세면대에서는 따뜻한 물도 잘 나왔다.
샤워실에는 동전 박스가 하나 있었는데, 동전을 넣으면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직접 써본 결과, 동전만 삼키고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찬물로 샤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관리동 2층 따뜻한 물 샤워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동전이 없다 보니(돈이 없다 보니) 비 오는 추운 날에도 어쩔 수 없이 관세청 건물에서 찬물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친 뒤에는 손건조기에 머리를 들이밀고 말리는 게 일상이 됐다. 그 순간 문득 서울역 노숙하시는 분들이 떠올랐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나도 지금 그쪽 라인에 한 발 담갔구나...”
진심으로 느꼈다. ‘노숙자’와 ‘나’는 그냥 한 끗 차이였다.

잠깐 소나기가 지나간 뒤, 현지 시간으로 오전 11시 30분경 요트로 돌아가 점심을 먹었다. 박종보님이 밥과 국을 지어주셨고,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마리나 휴게실로 향했다.
와이파이로 한국 사이트에 접속해 영화를 받아보려 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려 실패했다. 결국 소파에 누워 현지 방송을 보며 무료하게 오후 시간을 흘려보냈다.
저녁엔 선장님의 지시로, 낮에 먹다 남은 밥에 물을 붓고 라면을 넣어 일명 ‘꿀꿀이죽’을 끓였다. 반찬 하나 곁들여 저녁을 해결했다. 식사를 하며 또 한 번 느꼈다. “정말이지, ‘노숙자’와 ‘나’는 종이 한 장 차이구나…”
식사 후, 김정대님과 나, 그리고 또 다른 일행 한 분은 좁고 샌드 플라이가 들끓는 요트보다는 넓고 쾌적한 휴게실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한 분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잠들었고, 나와 김정대님은 TV 앞 바닥에 원형 쿠션을 깔고 누웠다.
이 마리나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과 가족들이 요트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른바 ‘하우스 푸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휴게실에는 늦은 밤까지 인터넷을 하거나 TV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화장실을 이용하러 오가는 이들이 계속 있었다. 휴게실 입구와 화장실 앞 조명은 센서로 작동돼, 누가 지나다닐 때마다 불이 환하게 켜졌고 그때마다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다. 숙면은 어려웠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이곳 사람들의 조용하고 절제된 태도였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극도로 꺼리는 문화 때문인지, 휴게실을 숙소처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요트의 불편함과 벌레를 피하려는 나름의 고육지책이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고,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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